의존을 배우다 책소개 책추천 북리뷰 서평 독후감 알쓸신잡

책소개
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장애학과 돌봄이론 분야의 석학, 에바 페더 키테이의 『의존을 배우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키테이는 중증 인지장애를 가진 딸 ‘세샤’의 어머니로서 딸을 보살핀 경험이 철학자인 자신에게 제기한 문제들을 사유한다. 책은 딸의 장애와 함께 살아낸 개인적인 현실에서 출발해서, 기존 철학의 틀을 토대부터 허무는 새로운 철학을 써나가는 데까지 나아간다.
전통 철학은 사유할 줄 아는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해왔다. 그렇다면 인지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키테이의 딸 세샤를 철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샤는 말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으며, 대화를 할 수 없기에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철학에서 전제하는 인간 조건인 이성을 지니지 못한 세샤를 인간 바깥의 존재로 바라봐야 할까? 자신이 헌신해온 철학이 사랑하는 딸의 존엄성을 보장하지 못할 때, 철학자로서의 삶과 어머니로서의 삶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키테이는 세샤와 함께한 삶이 철학에 일으키는 불화를 성찰하며, 인지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좋은 삶과 정상성, 인격과 존엄성 같은 철학적 개념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세샤는 베토벤과 바흐를 즐겨 듣고, 그 기쁨을 타인과 나누는 능력을 지녔다. 키테이는 세샤와의 삶을 통해, 사유할 줄 아는 능력과 무관하게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능력, 그리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물임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통 철학이 전제하는 인간의 조건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깨달음은 인간의 조건을 ‘이성'에서 찾아왔기에, 이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소수자나 비인간 존재들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전통 철학의 인격과 존엄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이처럼 장애의 렌즈로 철학을 바라볼 때 “삶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가르침을 얻는다.
발췌문
P. 13
철학자는 인간, 인격, ‘우리’ 도덕적 공동체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물어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종종 다음 질문과 결합한다. “우주의 다른 모든 것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우주의 다른 모든 것과 인간을 분간하는 집착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의식? 영혼? 언어?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웃음? 놀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동료 철학자들이 세샤와 같은 사람의 도덕적 가치(온전한 인격성)를 질문하기 전까진 무엇이 도덕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을 만드는지를 말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접기
P. 44
이성의 능력이 없음을 부인할 수 없으나 이토록 놀라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매일 하면서, 어떻게 이성을 인간 능력의 만신전 최고의 옥좌에 올리는 글을 계속 읽고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딸을 키우면서 어떻게 언어를 인간성의 표지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내 아이가 상호 계약적 합의에 참여할 수 없음이 명백한데, 어떻게 정의를 상호 계약을 통한 합의의 결과로 독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딸은 내가 공언한 철학적 믿음 대부분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그 믿음은 내가 받아들인 신조였을 뿐인가. 내 딸과 같이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존재한다는 생생한 현실과 내 철학적 믿음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접기
P. 56
내가 말하려는 내용의 대부분은 장애를 가진 삶이 지닌 가능성에 관해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우리의 지식은 무지라는 어둠에 둘러싸인 불에 비유할 수 있다. 불이 타오르며 어둠이라는 원은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우리가 얼마나 알지 못하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철학적 숙고에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될수록, 우리 지식의 원이 넓어질수록, 우리가 얼마나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도 커질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적 담론을 형성해온 직관과 경험을 만든 마법의 원을 넘어설 때, 우리는 숙고의 확실성에 관해 더 겸손해질 것이다. 접기
P. 61
장애운동가와 학자 들은 장애인의 의존이 비장애중심주의 사회의 구성물이며 이에 따라 장애인은 낙인과 배제에 처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나는 의존이 아닌 독립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P. 114
그저 살아 있고 세상에 있다는 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귀한 재능이다. 나는 이것을 내 늙은 어머니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행하는 사람이었다. 옷을 꿰매고, 뜨개질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타인을 돌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잃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점점 더 원통해하며 죽음을 바라게 되었다. 어머니는 돌봄이 필요했지만, 자신이 돌보는 자, 행위자라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야 우리는 어머니에게 뛰어난 돌봄제공자를 연결해드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점차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돌봄받고 그들과 함께하며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는 보행 보조기에 앉아 외출했고, 주변을 둘러보며 식물과 나무를, 놀고 있는 아이를 보는 것을, 스쳐 지나가는 산들바람을 즐겼다. 내 인생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가 존재를 그저 즐기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점차 삶의 마지막 단계에 적응하면서 원망과 억울함은 사라져갔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을 마주했다. 세샤는 어머니가 길고 온전한 삶의 마지막에만 얻었던 지혜를 지니고 있다. 사랑, 기쁨, 그저 존재함의 재능. 아마 인지장애의 경험을 관통하며 얻은 것일 테다. 접기
P. 165
내재적 가치의 영역으로부터 특정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마치 목탄화를 제외한 모든 예술 작품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목탄화를 제거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사라지는 것은 단지 목탄화로 완성되었을 수도 있는 모든 예술 작품뿐이다. 그 이상 구체적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사라지는 것은 단지 그 사람들뿐이다. 그 예술 작품이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가치 손실이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가치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몇 년 전에 말한 것을 여전히 믿는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사라질 때마다 세계는 줄어든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 “세계는 사실의 총체다.”를 수정하여 말한다. “세계는 내재적 가치의 총체다.” 접기
P. 196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Richard Pryor)는 중년에 다발성경화증에 걸려 한창 인기 있을 때 경력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것은 “축복입니다. …… 그것은 나를 느긋하게 그리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익숙한 방식으로 걸을 수 없고, 걷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 그것은 배우기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삶에서 누구도 신뢰해본 적이 없으며, 신뢰를 배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접기
P. 240
딸의 확장되고 극단적인 의존을 통해 뚜렷하게 의존을 바라보면서, 나는 많은 의존이 사회적 구성물인 만큼 독립 또한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샤의 의존은 단순한 부담이나 문제가 아니었다. 때로 특별한 종류의 상호작용이자 친밀감의 계기였다. 이 극단적인 의존은 우리 모두가 삶의 어느 순간에 경험하는 의존을 새롭게 조명했다. 그것은 내 딸의 가르침 중 가장 소중한 것에 속한다. 접기
P. 245
토빈 시버스는 “장애가 소란을 피운다.”라고 말했다. 의존의 필연성과 장애에 대한 취약성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없기에 우리는 이런 것을 투명 망토로 가리거나 반대로 낙인을 찍어 초가시화한다. 현대 사회는 ‘건강하고 원기 왕성한’ 노동자의 독립을 가치 있게 여기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온전히 기능하는 독립적인 성인 노동자에 엄청난 가치를 두는 사회의 이면에는 낙인찍히고 유아화된 장애인 개인이 위치한다. 접기
P. 249
독립을 옹호하는 논증의 다른 문제는 장애인 독립의 허용이 궁극적으로 공적 지출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독립생활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이 시설 거주와 견줘 더 적다는 데 기반한다. 게다가 보조를 통해 장애인은 사회의 생산적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필요한 서비스의 비용을 상환하고 중요한 물질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런 공리주의적 논증은 장애인이 사회의 ‘부담’이라는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받아치지만, 스스로 비용을 낼 수 없는 의존인을 공공이 책임져서는 안 된다는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접기
저자소개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철학과 석좌교수로 페미니즘 철학과 페미니즘 윤리, 장애학, 언어철학 분야에서 수많은 논문을 저술하고 선집을 편집했다. 돌봄과 인지장애의 문제를 철학에 도입한 연구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
단독 저서로는 『돌봄: 사랑의 노동』, 『메타포(Metaphor)』가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는 『인지장애와 도덕철학에 대한 그 도전(Cognitive Disability and Its Challenge to Moral Philosophy)』, 『페미니즘 철학에 대한 블랙웰 가이드(The Blackwell Gui... 더보기
최근작 : <의존을 배우다>,<돌봄 : 사랑의 노동> … 총 22종 (모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