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포르투갈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서>. 짧으면 원고지 2~3매, 길면 20매 분량인 에세이 480여 편이 실려 있다. 흔히 명예, 성공, 편리함, 소음과 번잡함 등이 인정받는 현시대에, 페소아는 그와 정반대되는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을 자신의 헤테로님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를 통해 노래하고 있다.
소아레스는 포르투갈의 도시 리스본, 특히 도라도레스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그곳 사람들, 그곳 풍경, 그곳에서 촉발된 상상력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맘껏 펼쳐 보인다. 480여 편에 이르는 각각의 글들은 원칙적으로 독립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 삶과 죽음, 내면의 심리와 외부세계와 같은 근원적이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가운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차분하고 섬세하고 치밀하면서도 치열하게까지 느껴지는 페소아의 글들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에 삶에서 부닥치는 전반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고뇌하는 한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소설가 배수아의 완역본.
발췌문
혼자만의 대화에 빠져 있던 도중에 순간적으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끼면, 바로 지금처럼, 나는 지붕들 위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을 향해 말을 건다. 소리 없는 산사태로 무너질 듯하여 더욱 가까이 보이는 도시의 비탈 위, 부드럽게 휘어진 모양으로 서 있는 높다란 나무들에게 말을 건다. 급격하게 경사를 이루며, 플래카드처럼 겹겹이 서 있는 집들에게 말을 건다. 하나하나의 창문은 플래카드의 철자와 같다. ―「텍스트 152」에서 접기
나는 달아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나는 홀연히 떠나고 싶다. 불가능한 인도나 모든 것이 기다리는 남쪽의 섬나라가 아니라,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 작은 마을이나 외딴 장소,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나는 이곳의 얼굴들을, 이곳의 일상과 나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내 피와 살 속에 뒤섞인 위선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 휴식이 아니라 생명으로서 잠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싶다.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 아니 험난한 산비탈 벼랑의 동굴이라 할지라도 내 이런 소망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의지는 그렇지 못하다. ―「텍스트 167」에서 접기
죽어가는 보랏빛 속에서 하루가 흐르며 저물어간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미지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왔다. 내 발자국은 저녁이 느리게 도래할 무렵 숲 속 개활지로 나 있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이가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었다. 마지막 배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 편지에 대해서, 우체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텍스트 205」에서 접기
호감이란 나에게 항상 피상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배우였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배우였다. 사랑을 할 때마다, 나는 마치 사랑을 하듯이 사랑했다. 나 자신이 그 대상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텍스트 261」에서
오늘 사무실의 배달원이던 그가 영영 고향으로 떠났다. 이곳 인간 집단의 한 부분으로 여겨왔고, 따라서 나 자신의 일부, 내 세계의 일부이기도 했던 그가 오늘 우리를 떠났다. 나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와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는 수줍게 마주 안았다. 내 마음의 뜨거운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으나, 나는 억지로 꾹 참았다. 한번이라도 우리에게 속했던 것들은, 비록 그것이 순전한 우연에 의해 우리의 일상이나 우리의 시선에 들어왔던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의 일부로 남는다. 오늘 내가 알지 못하는 갈리시아의 고향 마을로 떠나버린 것은, 나에게는 단순한 사무실의 배달원만은 아니었다. 내 삶의 실체를 이루는 일부, 눈에 보이는 내 존재의 한 부분이었다. 오늘 나는 줄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다. 사무실의 배달원이 떠났다. … 그렇다. 내일이나 아니면 그 어느 미래의 날, 죽음과 떠남의 종소리가 소리 없이 울려 퍼질 때, 나 또한 더 이상 이곳에,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가 될 것이다.
―「텍스트 279」에서 접기
230p
예술은 모든 삶의 활동으로부터 빠져나옴을 의미한다. 예술은 감정의 지적 표현이고 감성은 삶의 의도적 표현이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 감행하지 못한 것, 도달하지 못한 것을 우리의 꿈이 가능하게 해준다. 이 꿈으로 우리는 예술작품을 창조한다. 종종 감성은 비록 행위만으로는 감성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삶에서 조금밖에 표현되지 못한 이런 과도한 감성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두 종류의 예술가가 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예술에 투영하는 예술가와 자신이 과도하게 가진 것을 예술에 투영하는 예술가다. 접기 - :Dora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中 접기 - 도리스
🦋나는 인생이 집과 같다고 본다.
명부로부터 올라온 우편마차가
나를 데리러 오기까지
그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집이다.
마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것은 알지 못한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6p - 시우안미정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거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괜찮다.”
-26p - 시우안미정
내가 쓰는 글,
나는 그것이 형편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읽은
한두 명의 상처 입은 슬픈 영혼은,
한순간이나마 더욱 형편없는 다른 일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내가 만족하는가 만족하지 않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내 글은 어떤 방식으로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생 전체가 그러하듯이.
-45p 접기 - 시우안미정
P. 758
모든 것을 생전 처음인 듯이 감각하기.
인생의 신비를 종말론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꽃잎을 직접 만지며 감각하기. - banya
P. 28
나는 도시의 거리에 고인 긴 여름 저녁의 고요를 사랑한다. - 북깨비
P. 28
거리가 자아내는 느낌과 비슷한 삶의 느낌들이 산책 내내 나와 동행한다. - 북깨비
P. 32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 북깨비
P. 39
예술은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지만, 예술 덕분에 인생을 살기가 실제로 더 쉬워지는 건 아니다. - 북깨비
P. 40
내 영혼에는 마치 성가신 아이와 같은 짐스러운 조급함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자라나는 동일한 성질의 불안이다.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지만, 아무것도 나를 붙들어주지는 못한다. - 북깨비
P. 42
고백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고백을 해서 유용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모든 이에게 일어나거나, 혹은 우리에게만 일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첫 번째 경우라면 새로울 것이 없고, 두 번째 경우라면 타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다. - 북깨비
P. 45
결코 완성되지 않는 작품은 졸작에 불과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작품보다 더 졸작일 수는 없다! 완성된 작품은 최소한 탄생이라도 했다. 분명 대단한 명작은 아닐 것이나 그래도 노쇠한 내 이웃여자의 유일한 화분에 심어진 화초처럼, 초라하게나마 살아가고는 있는 것이다. 그 화초는 이... 더보기 - 북깨비
P. 64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을 말 속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나날은 항상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더보기 - 북깨비
P. 65
나는 눈을 감은 채, 잠들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해서 했을 말들을, 마치 고양이처럼 쓰다듬는다. - 북깨비
P. 75
들판의 그늘 속에서 우리는 내면을 향해 몸을 수그리고, 우리 자신이라는 문 없는 집 안에서 힘겹게 스스로를 지킨다. 저녁이 시작되면 석양은 서서히 펼쳐지는 부채처럼 번져 나가고, 아직은 낮의 사물들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싹튼다.
그러나 노동은 사그라드는 법이 없다. 노동... 더보기 - 북깨비
P. 83
나는 다른 이들의 나 아님이란 성격을 질투한다. 모든 불가능 중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것은 내 일상의 욕망이 되었고, 모든 슬픔의 시간을 채우는 좌절이 되었다. - 북깨비
P. 89
빗소리에서 정적이 피어난다. 정적은 회색빛 단조로운 크레셴도를 이루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좁은 거리 가득히 퍼져간다. - 북깨비
P. 89
내 삶의 모든 때늦은 통한이 멍한 내 시선 앞에서, 그동안 매일매일 수많은 예상치 못한 순간을 위해 늘 입고 다녔던 자연스러운 명랑함이란 의복을 벗는다. 나는 종종 기쁘고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슬픔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 북깨비
P. 105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그리워 가슴이 터질 듯하다. - 북깨비
P. 122
그들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이듯이 내 눈에도 그들은, 우리들 공통의 불행인 자신과의 불화를 힘겹게 끌고 가는 신세로 보인다. - 북깨비
P. 135
우리는 현실에 대해 작은 오해를 재료로 하여 믿음을 상상하며 희망을 지어 올리고, 마치 가난한 아이들이 공상의 놀이를 하듯이 빵껍질을 케이크라고 부르며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 북깨비
P. 179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이, 설사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나에게 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 북깨비
P. 193
모든 것이, 심지어 보통 때라면 우리에게 휴식을 주던 것들까지도 우리를 피곤으로 몰아가는 그런 시간이 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원래가 피곤을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고, 휴식을 주는 것은 얻겠다는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피곤해진다. - 북깨비
P. 212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미지를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상, 즉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 북깨비
저자소개
포르투갈의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 시인. 해럴드 블룸은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가운데 셰익스피어, 괴테, 조이스, 네루다와 더불어 페르난두 페소아를 꼽는다. 일생 동안 70개를 웃도는 이명(異名) 및 문학적 인물들을 창조하고 독창적인 글을 썼다. 포르투갈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 및 서로 다른 문체를 구사하였으며, 시, 소설, 희곡, 평론, 산문 등 많은 글을 남겼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일찍 친아버지를 잃고, 외교관인 새아버지와 함께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학업을 중단하였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생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생전에 출간한 포르투갈어 저서는 시집 『메시지』(1934)가 유일하다.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오랫동안 틈틈이 적은 단상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1935년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분류와 출판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밤을 채우는 감각들>,<불안의 책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 총 37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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